광주천생태문화탐방 (4월, 5월 기사)

관리자
발행일 2004-06-03 조회수 148

[광주천을 따라가며 보라]물이 시작되는 곳

계곡사이 폭포로 맑은 물이 부서져 떨어진다. 버들치 피리가 헤엄쳐 노니는 물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껍질 벗긴 포도송이 같은 도롱뇽알들이 `주렁주렁’ 깔렸다. 참나무 울울창창하여 하늘이 그리운 등성이엔 족도리풀 자주광대나물이 옴팡진 자리를 잡았다.
광주천의 발원지 샘골에서 물 따라 내려오는 풍경. 때묻지 않은 물길, 간섭없이 자란 식물들이 경이롭다.
샘골은 중머리재에서 장불재로 가는 길 해발 800m에 위치한다. 이곳서 발원한 물은 용추계곡 4.9km를 적시고 광주시내 19.3km를 휘돌아 총 24.2km의 광주천을 이룬다.
계곡 따라 흐르던 물이 치마바위를 거쳐 낙하하는 곳은 용추폭포.
중머리재에서 용추계곡 쪽으로 출발한 발걸음이 계속되는 내리막길에 흔들릴 즈음. 발길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듣는다. 고요함 속 수런수런 속삭임 같이 흐르는 소리, 때론 앙칼지게 쏟아지는 소리.
“용추폭포는 단옷날부터 칠석, 8월 삼복더위까지 물을 맞으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937년 2수원지가 축조된 후 상수원 오염을 막는다며 사람들이 접근 못하도록 일제때 광목부(지금의 광주시)에서 폭파시켰답니다.”
길잡이 박태규씨가 들려 준 아픈 사연이다. 폭파의 상흔을 안고 있는 이 물이 내뱉는 소리는 기실 비명일 터이다. 본 모습을 잃고 움푹 파였지만 물길은 끊기지 않고 변함없이 흘러 내렸다.
용추폭포를 지나 2수원지까지 가는 길은 원시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출입이 통제돼 온 곳. 인간들의 드문 발길이 식물과 고기들에게 `오진 터전’을 제공했던 것.
갖가지 야생초들과 물고기 개구리를 벗삼아 내려온 물은 용연부락 배암골 2수원지에 갇힌다. 1939년 준공된 이 수원지는 높이 35m, 길이 143m의 석축제방.
동복수원지 준공으로 주기능을 상실하고 현재는 보조수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막힌 물은 흐르지 못하고 댐 속에 갇혀 있다. 그나마 흘러내린 물은 아래 용연정수장으로 취합된다. 도수해 온 주암댐 물과 섞여 광주시민들의 식수 일부가 되는 것.
발원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샘골서 흘러온 물은 단 한 방울도 광주천에 이르지 못한다.
현재 광주천을 적시는 물은 정수장 아래 용연마을 계곡에서 흘러온 물. 건천화를 해소해 주기엔 역부족이지만 이곳저곳서 끌어모은 물이 화순 가는 큰 길 다리 `선교’ 밑을 지날 때까지 제법 풍부하다. 우거진 갈대밭을 통과한 물은 정화작용을 거쳐 깨끗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 물이 동구 내남동 내지교 부근을 지나면서부터는 말라붙기 시작한다. 광주천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채연 광주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팀장은 “유량이 적어 지표로 스며든 것과 직강화 등 인위적인 공사로 물길이 왜곡돼 하천기능을 상실한 것이 말라붙은 원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이 말라붙은 하천은 쓰레기장이었다. 소각한 흔적이 어지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광주천 상류는 자연형 하천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샘골에서 발원한 물이 용추폭포에서 시원스럽게 쏟아지던 광경은 꿈이었던가.’ 허망할 따름이었다.
광주천 생태기행 첫 회. 탄성으로 시작했던 발길은 남계마을 인근 1번 버스 정류장에서 탄식으로 멈췄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샘골 다녀왔습니다
지난 1월, 얼마 전 내린 눈이 아직도 깊이 쌓여 있는 날, 새해를 시작하는 광주천 지킴이 `모래톱’ 식구들은 광주천 발원지를 찾아 무등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래톱은 1년간 광주천을 드나들며 물과 풀, 거기에 깃들어 살고 있는 물고기, 새, 곤충들과 정들고 광주천과 광주사람들이 맺어온 삶의 문화를 생각하게 되면서 광주천이 시작하는 곳을 두 눈으로 확인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증심사 주차장에서 모인 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가파른 고개를 꼴까닥 넘어 중머리재에서 잠시 쉬고, 광주천 발원지 샘골이 있다는 장불재로 향했습니다. 해발 900m의 장불재를 100여m 정도 남기고 목 축이며 잠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즈음, 바로 거기에 돌들로 에워쌓인 작은 옹달샘 하나가 있습니다. 플라스틱 바가지 몇 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박한 곳이지요. `어 시원하다’ 물을 마시고 있자니 길잡이님께서 이 곳이 우리가 찾던 `샘골’이라고 일러줍니다. 그 어떤 거대한 물줄기도 따지고 보면 한 방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먼저 자리합니다.
장불재는 광주광역시(구체적으로는 동구 지원동 용연)와 전남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고갯길입니다. 이 고개를 따라 곧장 산 아래로 내려가면 화순군 이서면이므로, 옛날 이서·동복 사람들이 광주에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지름길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부터 이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들과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 동물들이 샘골에서 마른 목을 적시며 숨을 고르곤 했었겠지요. 오늘도 산에 든 사람들은 이 곳에서 머물러 지친 몸을 잠시 쉬어 줍니다.
가만히 물이 우러나오는 곳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내 몸의 배꼽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머니와 나의 이어짐의 징표가 배꼽이듯이 광주사람들의 어머니 산인 무등산과 광주의 젖줄인 광주천을 이어주는 것이 이 샘골이니까요. 무등산 장불재의 넓은 고산초원에서 흘러내린 물이 샘골이 되고, 중머릿재 아래 계곡의 널따란 치마바위를 흘러 그 아래편 용추폭포의 우렁찬 물줄기로 쏟아져 내립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여기 저기 물길이 더 합쳐지면서 광주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며 더 큰 강 영산강으로 합류해 들어가는 광주천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샘골을 보았으니 이 곳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광주천의 발원지, 샘골’이라는 고마운 이름자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현병순 <광주천지킴이 `모래톱’ 회장>


'무등등' 새 세상의 꿈 '남도 예술혼' 발원하다
▲ 증심사 입구 왼쪽 산비탈에 조성돼 있는 차밭. 오월에 이곳을 지날 때면 찻잎 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등산 중턱 샘골서 발원한 광주천은 원지교 근방에 이르러 새로운 물줄기와 합류한다. 증심사 계곡을 적시고 내려오는 증심사천이다.
 광주천 지류 중 최상류에 위치한 그 물길을 따라 광주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는 생태문화탐방 두 번째 나들이가 지난달 29일 열렸다.
 광주환경운동연합과 광주드림이 연중기획으로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시민·학생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김상윤(전 광주비엔날레 사무처장)씨와 이계표(문화재 전문위원·조선대사학과 겸임교수)씨가 길잡이로 나섰다.
 한여름 그늘 밑 보리밥이나 닭죽의 기억을 넘어, 그 계곡엔 사람이 있었고 문화가 있었고 그리고 광주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라는 `무등등(無等等)’의 절대평등 대동사상이 이곳에서 발원했으며, 한국 화단의 거목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예술혼을 꽃피웠던 남종화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었음에랴.
 `바람을 본다’는 관풍대 풍류는 여전
 `바람을 본다’는 풍류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증심사로 오르는 등산로 오른편, 계곡 사이 울창한 숲 아래 관풍대(觀風臺)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을 보았다는 옛 선비는 없지만 그선비 `관풍’했던 집 옆 계곡엔 그 때나 변함없는 바람이 숲과 속삭이고 있었다.
 관풍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춘설헌이다. 의재 허백련이 생을 마칠 때까지 30여 년간 화업을 일구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
 애초부터 의재의 집은 아니었다. 1930년대 최원순이 요양을 위해 지은 곳으로 호를 따 석아정이라 했다. 석아가 세상을 뜬 뒤 오방 최홍종 목사가 인수했을 땐 오방정이 됐다. 의재의 집이 될 운명이었을까. 오방정이라는 현판을 의재가 직접 써줬고, 현판을 바꿔 단 지 20여 년 뒤 의재가 인수하고 개축해 오늘에 이르렀다.
 크지 않은 아담한 집 한 채를 광주지방문화재 5호로 지정한 뜻은 건물 자체보다 그 터에 흐르는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것이 길잡이 이계표씨의 설명.
 그 계곡에 인물과 문화가 넘치는 것은 증심사라는 넉넉한 도량의 후광이랄 수도 있을 터.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이 사찰은 광주에서 가장 많은 유물을 간직한 곳이란다.
 일주문 옆 부도탑은 취백루 축대 아래 있던 것을 최근 옮겼다.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탑을 받들듯 증심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킨 고승들의 부도, 시주와 봉양으로 절의 터전을 닦은 신도들의 공덕비들이 모여 있다. `사찰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는 길잡이는 절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라며 `제대로 보기’를 주문한다.
 광주에서 가장 많은 유물 간직한 증심사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선암사->송광사)의 말사, 대웅전과 오백전·취백루·범종이 자리잡은 증심사엔 해탈을 꿈꾸는 중생들의 발길이 끊임없다.
 범종각을 지나 등성이를 오르면 펼쳐지는 초록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밭이다. 해방 후 가꾸는 이가 없자 의재선생이 삼애다원을 조성, 본격적으로 재배하고 관리했다고 한다. 의재에 의해 `춘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무등산 차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이 됐다.
 현재 의재미술관이 들어선 곳은 옛날 시내에 있었던 `춘목암’이라는 유명한 요리집의 별관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 또다른 길잡이 김상윤씨의 설명. 지금으로 치면 요정쯤 되는 곳이었는데 의재가 인수받아 삼애학원을 세우고 운영한 연유로 지금 의재미술관이 된 것이란다.
 `남종화’의 대가라는 의재의 업적에도 불구, 김씨는 다른 독해법을 제시했다. 우리의 산수에 몰두했던 `진경산수화’와는 달리 `남종화’는 청나라 고증학 영향을 받아 중화사상에 젖은 관념산수에 매몰됐다는 비판도 있다는 것. 그러나 무등산 자락엔 의재에서 서양화가 오지호 등으로 이어진 남도의 예술혼이 켜켜이 흐르고 있다.
 의재미술관은 유명 요리집 별관 자리
 그 계곡, 증심(證心)이라 한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 했으니 `마음을 증명하여 구원에 이르는 곳’이 아니겠는가.
 징심(澄心)이라고도 했다. `물맑을 징’자다. 항상 투명한 물과 같은 마음을 갖기를 경계함일 것이다.
 맑은 마음을 채근하는 깨끗한 계곡, 그 물이 흘러 광주천으로 간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1수원지 근대문화 보존해야

땅을 굴착해 인공적으로 물을 얻어 여과 정수해 사용하는 상수도시설은 우리나라에서는 1886년(조선 고종 23년) 부산에서 최초로 설치됐다. 그 후 서울(1908년), 인천, 평양, 대구(1918년)에 이어 광주에서는 1920년 5월 증심사 계곡에 위치한 제1수원지에서 최초로 하루 800톤을 생산, 통수함으로써 시작됐다.
제1수원지는 광주의 지하수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급수하기 위해 서둘러 시설됐다. 21만1600엔의 공사비를 들여 1917년 10월에 착공, 3년의 공사 끝에 1920년 5월 20일 준공됐다. 같은 달 30일엔 수도통수식이 거행됐다. 이날의 광경을 `매일신보’ 보도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 오전 7시부터 구경꾼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더니 9시경에는 서로 서로 길을 다토아 가면서 어깨를 부비고 수도회사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열 시가 못되아서 수만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백포장 위로 만국기는 맑은 하늘 가리고 수많은 구경꾼들은 공전절후한 일대장관이었다. 이날은 광주시내가 점방 문을 닫고 철시가 되다시피되었다.>
이와 같이 5월30일 정오에 수도통수식을 갖고 오후에는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경축행사를 하여 시내의 점방이 철시를 하는 등 대성황리에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이 수원지는 유역면적 0.48㎢에 흙으로 높이 13.3곒, 길이 106곒의 제방을 쌓았다. 저수능력 9만163톤에 급수능력 8000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였다. 이 수원지는 지금의 조선대학교병원 옆 산등성이에 정수장과 배수지를 만들고 연장 3481곒의 송수관을 만들어 광주 중심부 일본인들에게 급수됐다.
1967년 광주시는 제4수원지가 준공되고 뒤이어 동복의 대규모 수원지가 건설됨에 따라 제1수원지와 인근의 방대한 수원 함양림인 산림까지 합쳐 1970년 장한섭에게 6970만원에 불하하였는데 그뒤 소유권이 임장춘을 거쳐 청전가든에 넘겨졌다.
제1수원지는 1917년 착공돼 1920년에 준공된 광주 최초의 상수도시설이다. 이 수원지는 서양식 건축물과 더불어 광주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돼야 할 가치가 있는 유적인 것이다.
이계표 <광주시문화재전문위원·조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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