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원과 사직공원 일대

관리자
발행일 2004-08-03 조회수 267

7월 광주천생태문화탐방은 박선홍고문('광주일백년', '무등산'저자)님과 김영선(생태해설가)의 안내로 지난 7월 24일(토) 광주공원과 사직공원에서 18명의 회원과 시민이 참여하여 2시-5시30분까지 진행되었다.
광주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리우는 박선홍님께서는 광주공원, 사직공원과 광주천의 역사, 문화, 풍속, 생태, 인물 등등의 이야기를 무더운 날씨와 팔순의 나이와 수술후 요양중이심에도 불구하고 열과성을 다하시어 젊은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해주시었다.
박선홍님의 연륜과 지혜를 늘 가까이서 뵙고 모시는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래보며, 광주천과 광주공원, 사직공원의 옛모습을 뒤돌아보고 광주천과 영산강을 아우르는 생태문화도시 광주의 미래상을 그려보는 광주천생태문화탐방의 아쉬운 발길을 사직공원 입구에서 쉼없이 흐르는 광주천을 바라보며 마무리하였다.
#광주드림 채정희기자의 취재글을 첨부합니다.
물따라 역사도 사상도 흐른다
광주천을 따라가며 보라-광주공원과 사직공원 일대

▲ 권율도원수는 임란때 광주목사였다. 전라도병력을 이끌고 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업적을 기리는 창의비가 광주공원 내에 세워져있다.
근대 초기 광주천은 개화의 진입로였다. 일본 사람들이, 문물이 그 물을 따라 도심 깊숙이 들어왔다.
일본인들이 광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7년 목포항 개항 이후. 그들은 목포까지는 큰 배로, 영산포까지는 똑딱선으로 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남평을 거쳐 광주로 왔다. 다른 일부는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극락강을 거슬러 서창나루에 돛을 내렸다. 그렇게 들어온 일본인들은 광주천을 따라 올라 현재의 불로동․호남동 일대에 정착했다.
인접한 광주공원․사직공원이 그 격동의 물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시민들의 삶의 궤적과 다르지 않게 수난의 세월을 함께 했다.
광주천 따라 생태문화도시 미래상 그리기 네 번째 탐방은 24일 두 공원 일대로 떠났다.`살아있는 광주의 역사ꡑ 박선홍 선생과 생태해설가 김영선씨가 길잡이로 함께 했다.
광주공원은 산 모양이 거북모양을 닮아 원래 성거산 또는 성구산으로 불렸다. 이 거북의 생김새가 광주의 자랑이었다. 머리를 들고 사지를 활짝 편 위풍당당한 품새가, 기분 안좋을 때 머리․다리 몸 속으로 감춘 위축된 모습과는 딴판인 것. 사람들은 이 상서러운 거북이 도망가지 말라고 목덜미를 눌러 서오층석탑을 세웠다.
광주공원은 위풍당당한 거북모양
하지만 광주공원은 일제시대 두 차례에 걸쳐 크게 훼손됐다. 1914년 일제가 신사를 지었다. 원래 광주향교 땅이었지만 별도리 없이 터를 내줬다. 1940년 또 한번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다. `일본력ꡑ 2600년을 기념해 본토에서 징발해 온 나무들을 대대적으로 식재한 것. 향토수종이 거의 말살당했다.
하지만 국권을 회복한 뒤에도 파괴의 손길은 끝이지 않았다. 시민회관, 실내체육관, 종합체육회관, 무진회관 등으로 곳곳이 헐려나갔다. 박선홍씨는 ꡒ종합체육회관 자리가 거북이 머리에 해당되는 곳ꡓ이라면서 ꡒ그런 곳을 건물짓겠다고 파헤치고 폭파하고 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느냐ꡓ면서 혀를 찼다.
신사 들어서고 외래수종 심어져 훼손
결국 갈비집으로 간판을 바꿔 단 그 곳은 쇠락했다. 현재 광주공원에 남아있는 나무는 대부분 조경수. 거의 외래수종이다. 메타세쿼이아, 히말라야시더, 아까시 등 일본에서 들어온 활엽수 때문에 고유수종 소나무는 팔을 못 펴고 신음하고 있다. 위풍당당하던 거북이가 곳곳이 잘려 신음이 깊더니… 혼을 빼앗긴 역사는 생태조차도 지켜주지 못했다.
사직공원은 원래 사직단이 있던 자리다. `사ꡑ는 땅의 신을 가리키며 `직ꡑ은 곡식의 신을 가리키는데, 두 신께 제사드리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이 곳이 공원이 된 사연은 이렇다. 일 천왕의 결혼을 기념해 식민지 백성에게 `선물ꡑ을 줬는데, 광주가 받은 선물이 사직공원 조성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곳은 광주공원에 이어 신공원으로 불렸다. 공원조성 당시 벚나무를 많이 심어 한때는 벚꽃명소였지만 지금은 노쇠하고 사라져 그때의 장관은 찾기 힘들다.
사직단은 추수감사절과 같은 국가적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국상을 당하면 온 시민들이 모여 서울을 향해 곡을 토하던 `망곡제ꡑ를 지냈던 자리이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의 국상 때도, 1926년 순종의 국상 때도 그랬다.
천왕 결혼 기념 사직공원 조성
이런 곳에 동물원이 들어오면서 사직단이 헐렸다. 국태민안을 빌던 자리, 시도 때도 없는 맹금류의 포효는 시민들의 심사를 혼란스럽게 했다. 결국 민원이 빗발쳐 1991년 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이전하고 사직단이 다시 복원됐다. 현재 사직공원 일대에는 광주영상센터가 들어서 있고, 광주영상파크도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다. 문화중심도시를 향한 발걸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일대에는 역사를 담은 사료들이 많다. 1909년에 설립된 조선 최초 `조선금융조합ꡑ 기념탑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어린이 헌장탑이 서 있다.
임진왜란때 광주목사였던 권율도원수의 행주대첩을 기리는 공덕비가 있고, 우리고장 서정시인 김영랑․박용철 시비도 있다.
공자의 제사를 모시고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광주향교가 있고, 현충탑과 4․19위령탑도 있다. 광주공원 사직공원에 가면 그늘만 찾지 말고 역사를 찾을 일이다. 일제강점기 민족과 함께 한 수난의 흔적과, 그 아픔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온 광주의 혼을 만날 수 있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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